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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 상식 40) 빈 체제 - 절대주의로 회귀
    세계사 상식 2023. 10. 18.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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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의 여신 마리안느

    빈 체제의 성립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질서와 지도를 확정하기 위해 1814년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회의가 열렸습니다. 회의에서는 각국의 이해가 대립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재상은 자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연일 향연과 무도회를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각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회의가 진행되지 않자 각국의 지도자들은 연회에 참석하여 소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여론은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되지 않는다"고 비꼬았습니다. 마침내 귀양을 갔던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복귀하자 각국은 타협하여 빈 의정서를 조인했습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가 베네치아와 롬바르디아를 병합할 것이 결정되었고, 35개국 4자유도시로의 독일 연방이 형성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황제의 폴란드 왕위 겸임이 결정되었으며, 영국의 경우 실론과 케이프를 식민지로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패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외무장관인 탈레랑의 활약으로 혁명 이전, 즉 황족에 의한 절대주의가 채택되었습니다. 혁명에 의한 변화가 왕국이 부활하면서 퇴조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빈 회의에 의해 성립된 정치 체제를 "빈 체제"라고 합니다. 이로써 혁명의 재발을 막기 위해 각지의 군주들과 동맹을 맺은 러시아를 비롯, 유럽의 각국들은 혁명에 대해 무력 간섭을 규정하는 동맹을 맺었습니다. 시민 혁명 시대를 과거 왕정이 지배하던 절대주의 시대로 역행하게 한 것입니다. 

     

    자유주의 운동

       빈 체제에 저항한 각국의 국민들 사이에서 자유주의 운동과 국민주의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독일의 학생 동맹 운동, 러시아의 데카브리스트 반란 등이 그것입니다. 자유주의 운동은 빈 체제의 동요로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라틴아메리카 각국과 그리스에서도 독립 운동과 독립 전쟁이 일어나면서 빈 체제의 동요에 가세했습니다. 

     

    7월 혁명의 발발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는 귀족과 가톨릭 세력을 보호하는 한편, 알제리 원정에 강행해 국민의 관심을 밖으로 돌린 한편, 의회를 해산하고 언론과 출판을 통제했습니다. 산업 자본가들로 구성된 자유주의자를 의회에서 추방하려 하자, 1830년 7월, 파리의 민중은 라파예트를 시민군 사령관으로 삼아 7월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라파예트는 프랑스 대혁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혁명군은 3일간의 전투 후, 승리를 거두었으며, 샤를 19세는 그 후 영국으로 망명했습니다. 

       7월 혁명 이후 자유주의파 귀족이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가 국왕으로 선출되어 7월 왕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헌법을 개정하고 국민의 선거권을 확대했습니다. 또한, 시대 역행의 산물이었던 빈 체제의 신성 동맹에서 탈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산업혁명 시기 은행가와 대자본가를 옹호해 노동자 사이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듭니다. 이로써 민중의 불만은 고조되고 이는 훗날 2월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혁명이 미친 영향

       프랑스의 7월 혁명은 벨기에로 새롭게 탄생한 남부 네덜란드의 독립을 부추겼습니다. 이 움직임은 비록 러시아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폴란드의 독립 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는 통일 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독일 연방에서도 이 운동에 영향을 받아 1830년, 작센과 헤센 등지에서 자유주의자의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영국에서는 자유주의적 개혁이 진행됐습니다. 

     

    러시아의 남하 정책

       19세기 초, 러시아력으로 데카르리스트 달(12월)에 프랑스 혁명을 통해 자유주의 사상을 잡한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데카브리스트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이들 반란을 진압한 후, 전제 정치 체제를 굳히고 농노제를 강화했습니다. 그러자 폴란드가 대외적으로 독립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니콜라이 1세는 새로운 항구를 찾아 지중해로 남하 정책을 추진했다.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 영내의 그리스 정교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를 침범했습니다. 이것이 "크림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 맞서 영국과 프랑스는 아시아 무역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습니다. 지중해에 위치한 사르데냐 왕국도 이탈리아 통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측에 가담했습니다. 이렇게 결성된 연합군은 지중해의 관문인 세바스토폴에 주둔한 러시아의 흑해 함대의 기지를 함락시켰습니다. 결국 러시아는 패배하고, 1856년에 파리 조약에서 흑해의 중립화와 오스만 제국령의 보전 등이 결정됐습니다. 러시아의 남하 정책이 실패한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부상자를 간호한 나이틸게일은 "크림의 천사"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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